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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청주한씨 양절공파 돌림자 및 정보

by 한영수 2013. 1. 25.

   양절공파 韓 確( 확) 13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裕)

(用)○

○(履)

○(敎)

○(錫)

○(洙)

(相)○

○(熙)

○(悳)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奎)

○(載)

(鍾)○

(鎭)○

(承)○

(澈)○

○(根)

○(杓)

(憲)○

(炳)○

○(均)

○(重)

○(鎬)

○(鉉)

(泰)○

(源)○



아래는 청주한씨 정보입니다.

 

 청주한씨(淸州韓氏)에 대(對)하여

 

1. 청주한씨 시조 : 란(韓蘭)

 

2. 청주한씨 유래 :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유래(由來)는 후조선 (後朝鮮)인 기자조선(箕子朝鮮)에서 기원(起源)다.

(馬韓) 원왕(元王)의 아들 3인이 있어 우평(友平), 우량(友諒), 우성(友誠)이니, 나라가 쇠(衰)하자 우평(友平)은 고구려(高句麗)에 입사(入仕)하여 북원선우(北元鮮于氏)가 되고, 우량(友諒)은 신라 (新羅)에 입사하여 상당(上黨韓氏) 즉 청주한씨(淸州韓氏)가 되었고, 우성(友誠)은 백제(百濟)에 입사하여 덕양기(德陽奇氏)가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韓氏)는 모두 기자(箕子)의 휴예(後裔)가 되는 것이다. 기자는 은(殷)나라의 종실(宗室)로서 주왕(紂王)의 숙부(叔父)가 된다. 주왕((紂王)이 잔인하고 포악하여 국정(國政)이 쇠퇴함으로 주나라 무왕(周. 武王)이 이를 토멸하고 기자(箕子)에게 치국(治國)하는 대도(大道)를 청문하기로 홍범(洪範)을 자문하여 주고. 의리상 신복(臣僕)이 될수는 없다하여 고조선(古朝鮮)에 망명(亡命)하였는데 때마침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종말을 고하게 되자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후조선(後朝鮮)을 건국하고 예의(禮儀)로 교화(敎化)하여 예의군자국(禮義君子國)이 되었다고 다.

 

청주한씨(淸州韓氏) 시조(始祖) 란(韓蘭)은 지금의 충청북도(忠淸北道)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에서 탄생(誕生)하여 향학(鄕學)을 일으키고 청주(淸州) 방정리에 무농정(務農亭)을 세우고 농업(農業)을 권장하여 마침내 부농을 이루었는데 이때에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창업하는 공(功)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 이 되었으니 벼슬은 삼중대광 태위(三重大匡 太尉)이다

 

천지는 신묘(神妙) 위광(威光)으로 강산의 기이(奇異)함을 만들고 영웅(英雄)의 자품을 타고나서 나라의 훈업을 이루었으니 란(韓蘭) 그의 시호(諡號)는 위양(威襄)이라 하였다. 속리산맥을 타고 내려와 황간(黃澗) 땅에 이르러 우뚝 솟은 지장영봉(芝庄靈峰)은 사위(四圍)를 거느리고 멀리 백리에 뻗쳐 영기(靈氣)가 모였으니 이곳에서 당대의 위인(偉人) 란(韓 蘭)이 탄생하셨다. 옛부터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조(太祖)가 견훤(甄萱)을 정벌하려 청주(淸州) 고을에 당도하자 태위공께서 군례(軍禮)을 갖추고 이를 맞이하여 창고에 비축 곡식을 풀어 10만 군사를 배불리 먹이고 참전하여 전공을 세워 고려 왕조의 터전을 다졌으니 참으로 위대 분이다.

 

3. 청주한씨 본관연혁

청주(淸州)는 충청북도 도청소재지이다. 삼시대에 마의 땅이었다가 백제시대에는 상당현(上黨縣), 일명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 685년(신라 문무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757년(경덕왕 16)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청주로 지명을 고쳤고 983년(성종 2) 청주목이 된 뒤 995년(성종 14)에는 절도사를 두었다. 1012년(현종 3)에 안무사로 바뀌었다. 1018년에 전국에 8개 목(牧)을 설치함에 따라 다시 청주목이 되고,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주(州)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청주목을 유지하면서 충청도의 정치·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1651년(효종 2)에는 충청도의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되어 충청도의 군사적인 중심지도 겸하였다. 그러나 역모사건 등으로 1656~1667년, 1681~1689년, 1804~1813년, 1826~1834년, 1862~1871년 등 여러 차례 서원현(西原縣) 등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공주부 청주군이 되었고, 1896년에 충청북도 청주군이 되었다. 1906년 관찰사를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함으로써 충청북도의 주도(主都)가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청주면이라 개칭하였고, 1931년에는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읍으로, 1946년에는 청주부(淸州府)로 승격하였다. 1949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청주시로 개칭하였고 1983년 전국 행정구역 조정으로 청주시 지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1995년 동부·서부 출장소가 동부는 상당구로, 서부는 흥덕구로 승격하여 현재 상당구·흥덕구 2개 구가 있다.

 

4. 청주한씨 양절공파 13세 확(韓確)에 대(對)하여

 

1403년(태종 3)∼1456년(세조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 영정(永矴)의 아들이며, 덕종의 비(妃) 인수왕후(仁粹王后)의 아버지로, 성종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1417년(태종 17)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노구산(盧龜山) 등과 같이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으로 선발되어 명나라에 들어가는 황(黃氏)와 누나를 호송하였고, 누나가 여비(麗妃)로 책봉되자, 명나라의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에 제수되었다.

1418년 태종의 양위로 세종이 즉위하자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들어갔고, 1419년(세종 1) 1월 명나라의 책봉사(册封使)가 되어 부사인 홍려시승(鴻臚寺丞) 유천(劉泉)과 함께 귀환하였다.

1420년 1월 광록시소경으로서 예조참판 하연(河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태종 이래 추진하였던 금과 은의 공물면제를 주청하여 허락받고 귀국하였다.

1424년 명나라 성조가 북정(北征) 중 유목천(楡木川)에서 죽자 여비는 그의 비보를 듣고 자결하였는데, 명나라에서는 또 그의 누이동생을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간선하자 1429년에 조종생(趙從生)과 함께 진헌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명나라 사신이 입국할 때마다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어 접대하였다.

1435년 행중추원부사·지중추원사 등을 거쳐, 1438년 중추원사, 1439년 판성부사·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40년 병조판서·함길도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1443년 동지중추원사로 의금부제조를 겸하였고, 1446년까지 이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인사에 공정을 기하여 자못 명망이 있었다.

1446년 판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 평안도도관찰사 겸 평양윤으로 파견되고, 1448년에는 병마절도사까지도 겸대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 판중추원사를 지내고,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단종 즉위) 좌찬성이 되고,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455년(세조 1) 좌의정이 되고, 좌익공신 1등에 오르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개봉되었다.

1456년 사은 겸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양위라고 명나라를 설득하였다. 귀국 도중 사하포(沙河浦)에서 죽었다. 누나와 누이동생이 명나라 성조와 선종의 총애를 받음을 계기로 현달하였지만, 넓은 도량과 온간(溫簡) 성품으로 상하의 신망이 있었으며, 명나라 황실과의 유대와 공정하고 결단성 있는 정사로 외교와 내치에 크게 공헌하였다.

1470년(성종 1)에 세조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남양주시 능내리 능내역 서쪽에 자리한 양절공파

시조 한확 묘소 (襄節公派始祖 韓確墓所)


인수대비의 아버지이며 성종의 외할아버지인 양절공 한확(1400~1456)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 69-5 (능내리 단산로 551)에 있다. 팔당댐에서 다산로를 따라 양수리 방향으로 가다보면 도로변 야트막한 산자락에 있다. 입구에 있는 비각과 묘지의 규모는 왕릉에 버금간다. 특히 비각 안의 신도비는 중국에서 가져온 대리석이다. 이 거대한 돌을 어떻게 가져왔을까? 이 의문은 이곳에서 직선거리로 100리 떨어진 양주시 은현면 용암면 산 54-1에 있는 부인 남양홍씨 묘 신도비를 보고 풀렸다. 이곳과 같은 대리석으로 중국 황제가 내려 준 것이다. 운반은 코끼리가 했다고 한다. 홍씨 묘 앞에는 돌을 싣고 온 코끼리 묘가 있다. 한확은 청주한씨이며 순창군수를 지낸 한영정의 아들로 태어나 태종~세조대까지 영달을 누렸던 인물이다. 그 배경에는 손위누이와 여동생이 있었다. 원나라가 고려에 공녀를 요구했던 것처럼 명나라도 조선에 공녀를 요구했다. 조선은 명의 제3대 황제 영락제부터 제5대 선적제까지 약 26년 간 100여명의 공녀를 바쳤다고 한다. 태종 17년(1417) 2명의 공녀가 선발되었는데 그중 한확의 누이가 포함되었다. 그녀는 영락제 주체의 총애를 받아 후궁인 여비(麗妃)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명의 황후가 죽자 황궁의 정사를 전담하는 등 실세가 되었다. 그러자 그녀를 명나라까지 호송하였던 한확에게도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라는 명의 작위가 내려졌다. 그러나 영락제가 몽고 원정길에 사망하자 당시 풍습에 따라 여비도 순장을 당하였다. 영락제의 장남 홍희제가 제4대 황제에 올랐으나 1년 만에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손자 선덕제가 제5대 황제에 올랐다. 그러자 한확은 자신의 여동생을 공녀로 보내기로 했다. 언니가 순장으로 죽음을 당한 것을 알고 있는 여동생은 반발했다. 그러나 권력은 무서운 것이다. 그녀는 공녀로 명궁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74세까지 천수를 누리며 제8대 성화제를 어릴 때 보육한 공으로 공신부인에 책봉되었다. 이러한 배경은 한확을 출세가도로 달리게 했다. 특히 세조는 의경세자빈을 한확의 여섯째딸로 책봉함으로서 사돈관계를 맺었다. 한확은 좌의정과 좌익공신에 이어 서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세조2년(1456)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서는 세조의 왕위찬탈을 양위라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도중 사하포에서 57세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한(韓, 漢)씨와 청주한씨(淸州韓氏)


◆한(韓, 漢)씨는  우리나라에 ‘한’이라는 같은 음을 쓰고 있는 성씨는 둘이다. 하나는 ‘나라이름 한(韓)’을 쓰는 성씨이며, 다른 하나는 ‘한수 한(漢)’을 쓰는 성씨이다. 둘 다 모두 청주와 충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그 외 한(韓)씨 중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곡산한씨가 있다.  한(韓)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청주한씨 대종회의 주장에 의하면, 준왕(準王)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연나라 이주민 출신인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마한을 세우고 국가를 운영했다. 그 뒤 다시 마한이 망할 때, 마지막 왕인 원왕에게는 아들 삼형제가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우성(友誠), 우평(友平), 우량(友諒)이며, 이들 삼형제는 각각 기씨(奇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의 선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청주한씨의 시조 한란(韓蘭)은 기자의 후예인 우량의 원손(遠孫)이라는 주장이다(청주한씨세보). 또 다른 한(韓)씨로는 송나라에서 건너온 한예(韓銳)를 시조로 하는 곡산한씨(谷山韓氏)가 있다. 한예는 8학사의 한 사람으로 1206년 송나라에서 고려(희종)에 들어와 문하시중평장사를 역임하고 곡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아들 한희(韓禧)는 고려 때 밀직부사, 손자 한익(韓翊)은 판도판서, 한진(韓瑨)은 정당문학, 6세손 한옹(韓雍)은 조선 태조 때 병조판서가 되었다. 한이원(韓以原)은 조선 숙종 때 인물로 시(詩)와 역학(易學)에 뛰어났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곡산한씨는 1562가구 총 4917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인 4722가구에 총 2만119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에 비추어 의외의 결과이다. 아마도 대부분 한씨가 청주한씨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착오인 것 같다. 이러한 한(韓)씨는 2000년 국세조사에서 총 21만8821가구에 70만436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성씨인구 순위에서 오씨에 이어 12위에 위치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한수 한(漢)을 쓰는 한씨는 충주(忠州)를 단일본으로 하고 있다. 한(漢)씨는 한(韓)씨와 달리, 중국의 성씨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언제 한국에 들어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등장했다.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74가구에 325명으로 나타나 있다.  



한란의 묘 한란은 충북 영동 황간면에서 태어나 중년에 청주 방정리로 이주해 용개평야를

개척하여 부농이 된 뒤, 견훤을 정벌하는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공신이 되었다.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청주한씨는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가 315명, 상신(相臣) 12명, 공신(功臣) 24명, 대제학 1명을 배출하고, 왕비도 6명이나 배출한 명문거족이다. 한씨는 문헌상으로는 평산(平山), 한양(漢陽), 안변(安邊), 양주(楊州), 곡산(谷山), 홍산(鴻山), 대흥(大興), 부안(扶安), 개성(開城), 함흥(咸興), 금산(錦山), 단주(湍州) 등 10여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한예를 시조로 하는 곡산한씨를 제외하면, 모두 청주한씨에서 분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분적되었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청주한씨의 시조는 한란(韓蘭)이다. 그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 되고,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는 마한의 마지막 왕이었던 원왕의 세 번째 아들 우양의 31대 손으로 한지원(韓知原)이다. 그는 충북 영동의 황간면에서 태어났는데, 중년에 청주 방정리(方井里)로 이주한 뒤, 무농정(務農亭)에서 향학(鄕學)을 일으키고 용개평야(龍開平野)의 농토를 개척하여 부호가 되고, 왕건을 도왔다고 한다(청주한씨세적연보).  청주한씨는 한란 이후 30여파로 갈렸는데 그중 가장 번창한 양절공파(襄節公派, 파조 한확·韓確), 문정공파(文靖公派, 파조 한계희·韓繼禧), 충간공파(忠簡公派, 파조 한리·韓理), 몽계공파(夢溪公派, 파조 한철충·韓哲?), 관북파(關北派, 파조 한련·韓連), 충성공파(忠成公派, 파조 한명회·韓明澮) 등 6파가 대종을 이루는데, 이를 통칭 한씨 6파라고 한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청주한씨는 총 19만9642가구에 64만2992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청주한씨의 유래와 연혁  

충성공파는 충성공 한명회(韓明澮)를 파조로 한다. 한명회는 한란의 12대손 한기(韓起)의 아들이며, 조부는 고려말기에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조선개국 초기에 주문사로 명나라에 들어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해 받고 돌아온 한상질(韓尙質)이다. 또한 그의 증조부 한수(韓脩)는 공민왕 때 대언(代言)이 되어 신돈(辛旽)에 반대하였으며, 예서와 초서에 뛰어난 명필이었다. 또 작은할아버지인 한상경(韓尙敬)은 조선 개국공신이 되어 공조판서, 우의정 등을 지내고 영의정에 올라 서원(西原, 청주의 옛이름)부원군에 봉해진 사람이다. 이렇듯 빼어난 가문의 배경을 가진 한명회는 수양대군(세조)의 심복으로 단종 1년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정난공신 1등에 오르고, 이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냈다. 그의 막내딸이 성종비인 공혜왕후이다. 하지만 사후 연산군 때는 폐비윤씨 사건으로 촉발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이 토막내지는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했다.  그의 가문을 보면, 그에게는 아들 하나 딸 넷이 있었는데, 맏딸은 세종의 부마인 ‘파평윤씨’ 윤사로(尹師路)의 며느리가 되고, 둘째딸은 영의정 신숙주의 맏아들에게 출가하였으며, 셋째 및 넷째 딸은 각각 예종비와 성종비가 되었다. 또 손자는 성종의 부마가 되었다. 이렇듯 한명회 일가는 왕실과 이중삼중의 인척관계를 맺었다. 양절공파는 양절공 한확(韓確)을 파조로 한다. 그는 세종 때 병조와 이조판서를 지냈고 단종 때 우의정, 세조 때 좌의정을 지냈다. 그의 딸이 성종의 어머니이자 인수대비로 널리 알려진 덕종(성종의 아버지)비이다. 또, 그의 누이 둘은 각각 명(明)나라의 태종비(太宗妃), 선종비(宣宗妃)가 되었다. 또 그의 세 아들 한치인(韓致仁)과 한치의(韓致義), 한치례(韓致禮) 등도 출중했다. 또한 선조 때의 명재상인 한응인(韓應寅)은 한확의 6대손이다.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한익모(韓翼謨)와 그의 형인 대사헌 한현모(韓顯謨)는 한응인의 6대손이고, 이조판서 한광회(韓光會)는 7대손이다. 또,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낸 한용구(韓用龜)는 한현모의 손자이고, 예조판서 한정교(韓正敎)는 한용구의 손자이며, 고종 때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한장석(韓章錫)은 한용구의 증손이다. 


한명회의 묘 천안에 있는 한명회의 묘. 그는 세조의 책사로 알려져 있으며, 계유정난을 일으킨 뒤
실권을 휘둘렀다. 지금의 압구정동은 그가 지은 정자(압구정)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죽은 뒤
연산군의 모친인 폐비윤씨사건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했다.


양절공파의 방계(傍系)가 되는 한치형(韓致亨)은 한확의 조카인데, 그는 연산군 때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으나, 왕에게 충간하다가 참살되었다. 문정공파는 문정공 한계희(韓繼禧)를 파조로 한다. 한계희는 관찰사였던 한혜(韓惠)의 아들이다. 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세조 때에는 세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성종 때에는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훈구파 유학자로서 ‘경국대전(經國大典)’, ‘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을 편찬하였다. 형 한계미(韓繼美)와 아우 한계순(韓繼純)도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한효순(韓孝純)은 한계희의 현손이며, ‘동국지리지’를 저술하여 실학에 선구적 업적을 남긴 한백겸(韓百謙)은 한효윤(韓孝胤)의 아들이다. 그리고 한원진(韓元震)은 한계희의 9대손이 된다. 그중 한원진은 영조 때 심성론(心性論) 논쟁에서 인간의 성(性)이 같지 않음을 주장하여 ‘호론(湖論)’을 대표하였다. 그는 김장생(金長生)과 송시열(宋時烈)로 이어지는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고, 송시열이 저술하던 ‘주서동이고(朱書同異考)’를 완성하였다.  충간공파는 고려 말기 이부상서를 지낸 충간공 한리(韓理)를 파조로 한다. 그의 아들 한승순(韓承舜)의 세 아들 한서룡(韓瑞龍), 한서봉(韓瑞鳳), 한서구(韓瑞龜)의 후손들이 번창했는데, 특히 한서룡의 아들 오형제와 그 후손들이 빼어났다. 그중 한서구는 수양대군의 심복으로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정난공신에 오르고 중추원첨지사(中樞院僉知事)에 이르렀다. 


소혜왕후의 묘 인수대비로 알려진 소혜왕후는 한확의 딸이자 성종의 어머니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세자빈이 되었으나, 남편이 죽은 뒤 궁궐을 나왔다. 하지만,
아들인 성종이 즉위하자 다시 입궐하여 조선 초기 정치를 좌우하였다.


몽계공파는 다른 말로 보안한씨(保安韓氏)라 부르기도 하는데, 고려 말에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낸 몽계공 한철충(韓哲沖)을 파조로 한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산 속에 은거하며 충절을 지켰다. 그의 아버지는 예의판서·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한희적(韓希迪)이며, 조부는 보분각 직제학을 지낸 한연(韓璉)이다. 또 그의 아들로 한진(韓珍), 한염(韓廉), 한겸(韓兼), 한문(韓文) 등이 있는데, 각각 목사(牧使)와 예조판서, 현감을 지냈다.관북파는 함남 북청, 안변, 함흥 일대에 많이 살고 있어서 안변한씨로 부르기도 하는데, 파조는 예빈윤(禮賓尹)을 지낸 한련(韓漣)이다. 한련의 아들은 찬성사를 지낸 한유(韓裕)이며, 손자는 고려 말에 밀직부사를 지낸 한경(韓卿)이다. 한경의 딸은 이성계(李成桂)의 부인이자 나중에 신의왕후(神懿王后)에 추봉되었다. 그는 태조 즉위 후 문하부영사(門下府領事)를 지내고 안천부원군에 봉해졌기에 후손들이 관북지방을 중심으로 세거하게 되었다. 그 밖에 조선시대 청주한씨의 유명한 인물로는 동방 제1의 명필로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는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있다. 그의 본관은 삼화(나중에 청주한씨로 통합)인데 명종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가평군수를 거쳐 존숭도감 서사관(尊崇都監書寫官)을 지냈다. 또 인조 때의 학자였던 한교(韓嶠), 정조 때 동제활자(銅製活字)인 ‘한구자(韓構字, 한구의 글씨체로 만들어진 동제활자)’로 유명한 한구(韓構)가 있다. 이렇듯 청주한씨는 조선 초에 한확, 인수대비로 잘 알려진 소혜왕후, 정난공신 한명회 등의 인물을 배출하면서 훈구세력의 핵심이었으며, 이후에도 조정의 중심을 차지한 명문거족이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청주한씨를 가리켜 삼한갑족이라고 칭하고 있다.  


◆청주한씨의 근·현대 인물  

청주한씨의 근·현대 인물로는 구한말 참정대신으로 을사조약을 끝까지 반대한 한규설(韓圭卨)이 있으며, 시인이자 승려로 33인의 한 사람인 만해 한용운(韓龍雲)이 있다. 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옥사한 한글학자 한징(韓澄)도 역사에 남을 만한 인물이다. 또 청주한씨는 현대에 들어와서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최근에는 3연속 국무총리를 배출하기까지 하였다. 37대 국무총리 한명숙, 38대 한덕수, 39대 한승수가 바로 그들이다. 청주한씨의 유명인물들을 보면, 종교계에서는 한양원(민족종교협의회 회장), 한학자(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 한경직(목사), 학계와 정관계 인사로는 한갑수(한글학자), 한심석(서울대 총장), 한완상(부총리, 서울대 교수), 한승헌(감사원장), 한승주(외교부장관, 유엔총회의장), 한신(내무부장관, 국회의원), 한광옥(대통령비서실장, 국회의원), 한갑수(농림부장관), 한봉수(상공부장관), 한상대, 한격만(이상 검찰총장), 한환진(대법관), 한상률(전 국세청장), 한병기(유엔대사, 국회의원), 한규복(충북지사), 한범덕(행자부차관, 청주시장), 한희석, 한영수, 한건수, 한광석, 한상준, 한옥신, 한춘일, 한근조, 한태일, 한중건, 한석봉, 한기춘, 한병채, 한양순, 한선교(이상 국회의원), 한상진(서울대 교수) 한민구(육군참모총장), 한철수(육군대장), 한승원(소설가), 한하운(시인), 한인섭(강원대 교수), 한태동(연세대 교수), 재계인사로는 한상현(세방교통 사장), 한정호(대한잉크 대표), 한명석(동방관광 사장), 한상억(동산토건 대표), 한만우(한국신약 회장)가 있고, 연예계에는 한인수(탤런트), 한석규(배우), 한혜진(배우), 한효주(탤런트) 등이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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